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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어려워

우측보행, 좌측보행의 역사, 대한제국에서 초등학교 교과서까지

by 그리고실리콘 2025.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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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보행의 100년 역사 ― 대한제국에서 교과서까지, 길의 방향이 바뀐 날

길을 걷는 일은 일상 중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오른쪽으로 걷는 것(우측보행, 우측통행)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불과 15년 전까지만 해도 “길은 왼쪽으로 걸어야 안전하다(좌측보행)”고 배웠습니다. 이 변화의 뒤에는 100년 넘는 역사와 제도, 문화의 전환이 숨어 있습니다.

우측보행 포스터
국토해양부의 우측보행 포스터. 출처: 인터넷

■ 1905년 대한제국, 우측통행의 시작

우리나라에서 ‘우측통행’이 처음 제도적으로 규정된 것은 1905년 대한제국 시절입니다. 당시 공포된 「경무청령」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차마 및 인행(人行)은 도로 우측을 행할 것.” 즉, 수레와 사람 모두 도로의 오른쪽으로 다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통사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우측통행 법령으로 평가됩니다. 

 

당시 대한제국은 서구식 제도를 적극 도입하던 시기였으며, 영국의 좌측통행이 아닌 유럽·미국식 우측통행 원칙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이 원칙은 일제강점기 이후 폐지되며, 통행 방향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계단에 우측통행이라고 안내
우측통행 안내. 광역KTX역 계단에서

■ 1921년, 좌측통행으로의 전환과 혼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교통체계를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1921년 조선총독부령 제142호(도로취체규칙) 개정을 통해 차량과 보행자의 통행 방향을 좌측으로 일원화했습니다.


시행일은 사료에 따라 1921년 4월 1일 또는 12월 1일로 전하지만, 어느 쪽이든 그해 전국적인 방향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합니다. 당시 총독부는 단기간의 계몽·계도 활동을 벌이며 인력거와 마차에 ‘좌측통행’ 표지를 부착하고 순사들을 거리로 내보냈습니다. 순경이 “왼쪽으로 다니시오”를 외치며 사람들의 동선을 바로잡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간 오른편으로 걸어온 조선인들에게 변화는 쉽지 않았습니다. 거리 곳곳에서는 보행자와 인력거가 엇갈리며 충돌이 발생했고, 신문에는 “통행 전환 첫날 도로가 어지럽다”는 보도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 해방 이후, 차량은 우측·사람은 좌측

1946년 미군정은 미국식 교통규범을 도입하며 차량 우측통행을 법제화했습니다. 그러나 보행자의 통행 방향은 명확히 정비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차량은 오른쪽, 사람은 왼쪽으로 걷는 불일치한 체계가 수십 년간 이어졌습니다.

 

이 시기, 지하철 통로와 계단에서는 보행자 충돌이 빈번했고 ‘에스컬레이터는 오른쪽에 서라, 왼쪽으로 걸어라’는 임시 규칙이 뒤섞이기도 했습니다. 이 불일치한 보행 문화는 결국 정부 차원의 제도개선을 요구받게 됩니다.

 

■ 2009년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보행문화 개선 결정

2009년 4월 29일, 제12차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토교통부가 준비한 ‘보행문화 개선방안’이 의결되었습니다. 위원회는 차량과 보행 방향을 일치시키고 보행 효율성과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보행자의 우측보행 원칙을 채택했습니다.

 

같은 해 하반기부터 지하철역·공항·대형시설에서 시범운영이 시작되었고, 2010년 7월 1일부터 전국적으로 우측보행이 전면 시행되었습니다.

 

도로 표시, 복도 안내선, 에스컬레이터 방향이 모두 오른쪽 기준으로 통일되면서 보행문화가 새 틀을 잡게 되었습니다.

계단에 우측통행이라고 쓰여 있다
계단에서는 우측통행. 광명KTX역에서

 

■ 법적 근거 ― 「도로교통법」 제8조

우측보행의 법적 근거는 「도로교통법」 제8조에 있습니다.

제8조(보행자의 통행) ② 보행자는 보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아니한 도로 중 중앙선이 있는 도로 (일방통행인 경우에는 차선으로 구분된 도로를 포함한다)에서는 길가장자리 또는 길가장자리구역으로 통행하여야 한다.

 

이 조항은 보행자의 통행 위치를 명확히 하여 보행안전과 방향 일관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즉, 우측보행은 단순한 권장사항이 아니라 법률적 근거를 가진 안전 규범입니다.

 

■ 교과서의 변화 ― ‘왼쪽으로 걸어요’에서 ‘오른쪽으로 걸어요’로

보행 방향의 전환은 교육현장에서도 일어났습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바른생활」 교과서에는 “길을 걸을 때는 왼쪽으로 다녀요”라는 문장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좌측보행 문화가 교육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09년 우측보행 정책 시행에 맞추어 유아·초등 교과서의 보행 지침이 ‘오른쪽으로 걸어요’로 수정되었습니다. 교육부와 국토해양부는 교과서 40여 종의 내용을 개정하여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새로운 보행습관을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했습니다.

 

■ 국민 적응도 ― “10명 중 7명은 이미 익숙하다”

우측보행 시행 10년이 지난 2020년 보도에 따르면, 국민 100명 중 72명(72%)이 ‘우측보행에 적응했다’고 응답했습니다.


이 가운데 ‘우측이 더 편하다’는 응답이 54%, ‘좌측이 더 편하다’는 응답은 12%로 나타났습니다. 젊은 세대일수록 우측보행이 자연스러웠으며, 60대 이상에서는 여전히 좌측보행에 익숙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정책 시행 10년 만에 국민 10명 중 7명 이상이 새로운 방향에 적응한 셈입니다.

 

■ 정리하자면...

1905년 대한제국의 「경무청령」으로 시작된 우측통행은 1921년 좌측통행으로 바뀌었다가, 2010년 다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이 변화는 단순히 길의 방향을 바꾼 것이 아니라, 제도·문화·교육이 함께 움직인 사회적 전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오른쪽으로 걷는 이 자연스러운 행위는 100년 동안 이어진 제도와 기억의 흔적 위에 서 있는 결과입니다. 길의 방향은 곧 문화의 방향, 우측보행은 그 변화의 상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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